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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1일 화요일

독일이란 나라

독일이란 나라

독일 역사, 문화, 문학 등등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 네이버 지식인들이 이미 정리를 잘 해두었을 것이므로, 내가 바라보는 독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왜 독일에 왔는가

솔 직히, 나는 한국에서 숨막힐 듯한 경쟁과 남의 눈치 보느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답답함에 남미에서 살고 싶었다. 페루에서 1년동안 살기 전, 뜨거운 태양을 맛보며, 순간을 즐기고, 춤이나 추고 놀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도, 걱정도 없이 순간에 충실하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현실이었다. 한국 검찰도 주눅들게 만드는 남미의 부정부패, 인종 차별, 사회문제, 환경 오염은 정말 지긋지긋한 토할 것 같은 일상이었고, 가난에 찌들어 오히려 한 푼이라도 벌고자 투쟙 쓰리쟙을 마다하지 않는 미혼모들을 맞닥뜨렸다. 열정과 행복의 남미인들의 가면에 가려진 쓰라린 상처와 삶의 고통에 가슴이 너무나 아팠고, 같이 울기도 했으나, 그 사회에 소속되고 싶지는 않았다.

페루 생활 동안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그 때 북유럽, 중부 유럽 아이들과 살게 되었다. 일도 어느 정도하고, 삶도 어느 정도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특히, 대학 학비가 공짜고, 해외 경험을 위해 국가에서 한 달에 400유로를 생활비로 준다는 친구 말이 너무나 솔깃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꼭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서 살아야지 라고 결심하게 됐다. 물론, 복지를 위해서라면 노르웨이나 핀란드로 갔어야 했으나, 그들의 파란 눈을 보고 있자니, 빙하 호수보다 더 차갑게 느껴져서 네덜란드와 독일로 결정했던 것 같다. (경험이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중부 유럽 사람들보다 더 개인적이고, 거리를 두는 듯 싶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오랜 무역의 역사를 통해 특유의 능글능글한 넉살좋은 성격을 지닌 듯 하다.)

이 외에도, 나의 똘끼로 인해 나는 독일 문화와 독일어 ´빠´ 였다. 세계 2차 대전 영화를 즐겨봤고, 히틀러 다큐맨터리를 찾아봤으며, 심지어 독일어가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게 들렸다. (스페인 친구들은 이를 들으면 분노한다. 세계의 섹시 심볼인 스페인어라는 자부심이 싫지는 않은가 보다. )

내가 본 독일 모습, 중구 난방 콩가루 집안.
Nazi, Merkel, 잘나가는 경제, 맥주, 놀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빵빵한 사회복지 제도를 생각하여 아무 생각 없이 독일에 도착했으나, 독일은 나의 생각과는 굉장히 달랐다.
우 선, 독일은 지방색이 굉장히 강해, 한 나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악센트도 굉장히 강해서 스위스 독일어, 바이에른 독일어는 타 지방 독일인들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간략히 대표적인 것만 소개하자면, 베를린은 히피와 무직 예술가 들이 넘치는 자유와 낭만의 도시이고(독일 사람들은 베를린이 독일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파격과 자유로움은 보수적인 독일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가보다.), 함부르그는 독일 무역의 중심지로 오픈 마인디드의 부잣 동네이고, 뮌헨은 산업, 문화 중심지로 바이에른 주의 자부심이 강한 콧대 높은 거만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가 아는 독일 문화 대부분은 바이에른 주 문화로 옥토버 페스트, 호프 브로이 맥주, 디언들(독일 전통 의상)이 그 예이다. 이 외에도 독일의 각각의 주와 지방은 그 색채가 정말 다양하다. 특히, 독일 역시 분단국가였기에 서독과 동독의 문화 차이 역시 굉장히 크다.

독일인지 아랍인지 헷갈리는 대도시들
독 일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이민자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특히, 부동산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나같은 돈없는 이민자들은 흔히들 생각하는 자갈돌 길과 중세 풍 건물이 있는 중심 시가지가 아닌 소위 ´게토´로 밀려나게 된다.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베를린과 프랑크 푸르트에서 총 4번의 이사를 했는데, 전부다 터키 혹은 아랍인 주거집단에서 살게 되었다. 지나친 전쟁 영화 학습으로 ´아리안´의 모습을 기대하고 왔는데, 막상 이웃 주민들은 모두 모하메드 같은 느낌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아랍, 터키 음식점, 상점들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수퍼마켓에서는 터키어, 독일어가 병기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 사회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대놓고 이민자들을 무시하는 독일인들, 문화 충돌과 동화 문제를 걱정하는 모습들, 새로운 문화를 쿨하게 받아들이는 젊은이 등등. 독일과 터키 문화 사이에 긴장이 터질 듯 보는 이도 심장 조이게 만들면서도, 가끔은 아무 문제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듯 하기도 하고, 참 조화인듯 조화같은 조화 아닌 조화라고 해야하나?

Metropolitan and International
일 전에도 썼듯이, 독일 대도시는 굉장히 국제적이다. 나의 경우, 친구들은 대부분 외국인 아니면이민 2세 아니면 혼혈 친구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이태원이나 가야 경험할 수 있었던 이런 문화간 혼합과 조화, 공존이 이 곳에서는 당연한 일상이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제각기 섞인 다양한 문화에 ´Multi culti´라는 고상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물티 쿨티´는 독일인들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위험한 실패한 가난한 이민자 집단촌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세계 2차 대전과 유럽 내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로 독일은 어쩔 수 없이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했고, 지금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는 비단 독일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안산 등 산업 도시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동남아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에서 태어난 자녀인 Cosian이 농촌 학생의 25프로가 넘는단다. 독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50년 전만 해도, 보수적이고 단일 민족 역사 의식이 강한 나라였다. 지금의 독일 역시 ´물티 쿨티´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된 상황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일단, 인종 대학살과 전범 국가로서 독일 사회는 아직도 반성을 많이 하고 있고 새로운 문화를 배척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일반 시민들의 인식도 역사 교육 때문인지 굉장히 다문화 포용적이고, 성숙하다.
불과 70년전, 독일은 ´단일 우월 민족´이라는 거짓 환상에 세뇌되어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과 동성애자, 장애인, 집시 등 사회 소수집단을 학살했다. 70년 동안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일 민족 신화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우리 나라 역시 금방 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독일에서 뭔가를 배우기를 바란다.
넌 독일을 아니?
독일 친구가 나에게 독일이란 나라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적어도 ´일단 독일인보다도 독일 역사,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거라고´ 답했다. 친구는 나에게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너무나 빨리 변해서, 나도 무엇이 독일의 모습인지 전혀 모르겠어.“
참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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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녕하세요 서울에 살고 있는 40대 남자 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독일 사회를 좀 더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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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안녕하세요~ 글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직장인이라 자주 올리지는 못하는데, 틈틈히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주제 잇으심 문의 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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