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충”이란 단어에 관한 한 엄마의 항변
독일에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 오니 “맘충”이란 신조어가 생겨 있었다. 난 그저, 소수의 일베 회원이나 쓰는, 개념없는 인간들의 “인터넷 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실상은 달랐다.
물론 아이를 예뻐해주는 사람은 참 많았다. 그래도 정중하게 “이유식”을 데워달란 요청도 “맘충”이고, 아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카페나 레스토랑도 많이 생겨났다. 대형 주상복합단지가 아니면 놀이터도 없는 이 곳에서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더 서럽고 얄미운 건, 맘충에 대한 불만에 대해 결혼을 안한 여자인 친구들의 반응: “그래도 요즘 한국에 개념없는 엄마들 무지 많아.”,”뉴스에서 한 진상 엄마 행위 못들었어?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맘충이란 얘기가 나오는거야”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자기는 “그런 짓을 안한다며, 맘충 같은 부모가 부모 명성을 다 흐린다”고 했다.
엄마건, 엄마가 될 여성이건 “맘충”이란 단어의 용법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듯 했다.
나는 이 글에서 구태여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모성애의 발현이며, 생명을 불어넣는 신성한 일이라고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다.
대학 출신의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가 한 순간에 엄마로 전락한 것이 힘들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맘충”이란 단어가 얼마나 엄마들을 위축되게 하는지,
우울하게 하는지를 그저 보여주고 싶다.
육아라는 일이 칭송받지는 않더라도 왜 맘충이란 단어를 쓰면 안되는지만 설명하고 싶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힘들고, 고된 걸 넘어서서 참으로 심심한 일이다. 적어도 아이와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0-3세 시기가 이렇다. 집 안에서 말도 안 통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있다보면 너무나 심심하고,
시간은 더디게 간다. 아이에게 좋지 않을 까봐 TV나 스마트폰도 못보고, 책 읽기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
자기 아이라 당연히 예쁘지만, 보는 건 잠깐 잠깐 예쁘지, 하루 종일 아이 얼굴 보는 건 솔직히 지겹다. 아이들 역시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더 울고 짜증을 낸다.
(물론 아기가 예민하고,
울면 지겨움을 못 느낄 정도로 고되고 힘들다.) 세상과 고립, 단절된 것 같고,
너무나 외롭다.
이 전 정장을 입고 열심히 사회 생활을 했기에 이런 고립이 더 힘들다. 출산후 우울증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자살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린다.
이 전에는 출산율이 높아 동네에 아기 엄마들이 몇 명씩 됐고, 이 엄마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아이도 돌봐주고, 수다도 떨었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가 만 29살, 옛날이었으면 아이도
3은 났을 나이지만, 내 친구
30명 중에 아이가 있는 친구는
3명, 나머지 27명은 모두 미혼이다. 친구들도 남편도 일하느라 바쁘고, 동네에 아이 있는 엄마도 찾기 힘들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3-7세는 활동력이 왕성해 집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곤역이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공터에라도 나가서 뛰 놀도록 풀어 놓아야 한다. 말대꾸를 시작하는 아이와의 대화는 더욱더 힘들어진다.
아이와 같이 갈 장소를 적극적으로 찾아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들 엄마와 만나도 갈 곳이 없다.
영세 아파트의 놀이터는 사라져가고, 공원 하나 없는 곳에서, 카페는 “노 키즈존” 팻말을 내걸었다.
주상 복합 단지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따로 있다는데,
서울에 이런 아파트 살려면 전세가
8억이다. 모 키즈 카페는 입장료만 아이와 어른 각각 시간 당 만원이며, 최소 8000원 짜리 음료도 따로 시켜야 한다.
큰 맘 먹고 키즈카페라도 가면 “남편이 힘들게 번 돈으로 커피나 마신다며,
좋은 팔자의 맘충”이 된다.
길가에 가서 아이랑 놀자니 너무나 무섭다.
인도와 횡단보도에서 질주를 하는 오토바이를 보면 자살행위 같다.
이거라도 하면,
“위험한테 길가에서 애 놀리는 아줌마는 맘충”이다. 돈이라도 많으면 “짐보리”같은 어린이 놀이터에 보내면 좋은데,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교외로 나가고 싶은데 아이와 단 둘이 운전하는 건 힘들고-“맘충 운전자”가 된다-,
대중 교통을 타고 가자니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에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단념한다. 가뜩이나 가득 찬 지하철에 유모차를 비집고 타는 순간 “맘충”이 된다.
지방의 키즈 카페 이용료. 2시간에 입장료만 12,000원이다. 음료와 음식은 따로다. 수도권은 더 비싸다. |
이러한 상황에서 “맘충”이란 단어는 외롭고 고립된 엄마들을 더욱더 집에 가둬둔다.
진짜 그런 “맘충”같은 행위를 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아이가 카페나 식당에서 소리라도 지르면 쫓겨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맘충”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이 쓰는 단어라고 해도, 왠지 아이를 째려보는 사람들은 다들 나를 맘충으로 생각할 것만 같아 불안하고, 내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진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죄인처럼 느껴진다.
맘충 같은 labelling은 “김치녀”, “된장녀” 등 사회적 약자에게만 붙여지는 labelling
현상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치녀”들은 “내가 내 돈 내고 커피 마시는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자기 항변을 하기도 하고,
떳떳할 수 있다. 우리는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무엇이든 용납되는 극도에 “자유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어떤 일이든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이 된다.
아이 키우는 일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남에게 피해가 갈 수 밖에 없다. 갑자기 떼를 쓰고, 울기도 하며,
뛰어 다니기도 하고, 밥을 안먹겠다며 입에 든 음식을 뱉어내기도 한다. 아이가 머문 자리는 금새 엉망진창이 된다.
엎친 데 덮친 격, 나는 초보 엄마다. 엄마라는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커가는 아이와 있으면 날마다 새로운 미션이 주어지는 느낌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밥을 잘 먹었는데, 갑자기 오늘부터 반항기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떼써서 당황했는데, 심지어 응가를 했다.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있는 지 확인 먼저 해야한다는 당연한 사실은 잊혀지고 일단 수습부터 하고 본다. 엄마를 흘기는 시선과 당황스러움에 엄마는 응가 기저귀를 치우는 걸 깜빡하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이 엄마의 행동은 “맘충”으로 인터넷에 떠돈다. (물론, 절대 이 행위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 당 입장료 10,000원인 키즈 카페를 감당할 수 없는 엄마들은 집에 머물게 되고, 밖에 나가는 것이 무섭다. 대중 교통 타는 것이 무섭고, 맘충이라고 할까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 아이가 피해를 끼칠 까봐 무섭고,
그리고 아이는 피해를 끼칠 것이기에 나가지 못한다. 결국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된다.
이러니 남편이 퇴근해서 인간다운 대화라고 하려고 남편에게 이것 저것 말도 걸고,
아이 보느라 못한 샤워, 설거지, 저녁 먹기 등 기본 적인 행위를 후다닥 해치운다.
매일 매일 집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엄마들, 도대체 오늘 하루는 어떻게 견딜까라고 매일 아침 생각한다. 어느 엄마는 우울증에 견디다 못해 아이와 동반 자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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